한 장의 달력은 한 달의 모판 한 판이었고 하루하루가 혹여 펑크가 나진 않을까 조바심 내며 부지런히 못자리에 모를 쑤셔댔다(그만큼 쫀쫀한 일상이었던 것!). 모 심을 자리를 맞추는 못줄(폭풍스케줄)에 따라 착실한 모꾼마냥 한 줄 한 줄을 놨다. 처리하는 업무만큼 스트레스도 삐죽삐죽 돋아났다. 자, 이제 휴일이다. 알지게 맺은 내 스트레스여, 나에게 오라. 깨 타작하듯 털어주마! 글ㆍ사진 홍신혜
Track 1. 고양이와 한가로운 시간 ♬
앗, 이런. 오늘부터 장마. 비 오는 날엔 외출 준비물이 많아져서 성가시다. 신발이 눅눅해지는 것도 질색이다. 비 오는 궂은 날씨엔 그저 안락한 집이 최고! 일손을 놓고 집에서 놀아보자. 그동안 잦은 외출로 소홀했던 동거묘(루시와 꾸시)에게 살갑게 다가간다.
비싸다고 사주지 못했던 옷도 만들어 보자. D.I.Y는 손재주가 좋은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엄청나게 만만한 D.I.Y
준비물: 늘어난 수면 양말과 가위
겨우내 신어서 잔뜩 늘어난 수면양말을 꺼내 고양이 옷을 만들자.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바느질은 안녕~ 늘어난 수면양말의 수축성과 고양이의 낭창함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었다. 고양이(꾸시)도 흡족한지 갸르릉대고 겉보기에도 꽤 그럴싸하다.
고양이와 함께 책을 읽는 건 나에게 더 할 나위없는 행복이다. 사람 배 위에 올라가길 즐겨하는 고양이가 푹신한 배에서 책으로 뛰어내릴 확률은 거의 없다(고양이가 종이 페티시를 갖고 있지만 따뜻하고 폭신한 배가 종이 페티시를 이긴다!). 전공서적처럼 어려운 책이 아닌 이상 책 내용도 눈에 잘 들어오고 적적했던 마음이 보드라운 고양이털과 내 피부가 맞닿으면서 사르르 녹아버리니까. 이따금씩 내는 냐옹, 소리도 마음의 마사지가 된다. 동거묘 루시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하품을 하는 순간 입 안에 쌍 침기둥이 솟는다. 그렇다면 넌 자야겠구나.
모든‘ 키친테이블노블’은 애잔하면서도 즐겁다. 어떤 경우에도 전적으로 나를 위해 쓰니까.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세상에 나간다는 두려움 없이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에 한없이 적어나가니까. 나의 마음무늬를 종이에 그려가는 일은 썩 멋지다. 경쟁에 입문하지 않고 뒤처진 아마추어의 자유와 즐거움에 푹 빠져있는 웅크린 시간. 내가 그리고픈 걸 맘껏 그리는 시간, 내 생각을 맘껏 적는 시간, 그 집중의 시간이 내게 주는 치유의 에너지는 정말 크다. 과정을 즐기고 순간에 만족한다는 것의 참뜻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갑자기 진지하게 왜 쓰고 그리는가,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즐겁게 돌아가던 마음 바람개비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바람개비가 이제 돌아가지 않는다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바람개비를 잡고서 힘차게 달려 나가면 그만이다. 기세등등하던 장마가 크립톤을 만난 슈퍼맨마냥 까무룩 기세를 잃었으니 이제 방안의 고요하고 평안한 나의 시간들이 지나간 장마가 만든 고인 웅덩이를 보며 작별을 고한다. 이제 가방에 가벼운 책과 선글라스를 챙겨 넣고 현관을 나선다. 쨍한 여름햇살이 가진 힘이 이런 것일까? 발끝이 땅에서 한 뼘쯤 떠서 어디로든 흘러갈 자세가 되어 있는 것. 다시 내 마음의 바람개비가 팽그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한다.
청계천을 걷다 보면 광교에 놀이터 하나가 나타나는데 바로 백설 공주 놀이터다. 아기자기한 버섯과 난쟁이 틈에서 놀면서 백설 공주 동화 속으로 빨려간 듯하다. 뒤에 숨기고 있는 칼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해 익살스런 가위바위보 놀이도 해본다. 도시에 숨은 CCTV 찾기 놀이도 하고.
Track 2. 낯선 동네 놀러 가기
그럴 때가 있다. 모든 게 익숙하고 빤한 우리 동네를 벗어나고 싶을 때. 나를 낯선 곳에 던져놓고 싶은 충동.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나의 오감은 바빠진다. 나의 모든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 익숙한 일상 풍경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다. 종로 부암동 언덕길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 최적이다. 둥그런 담 굽어드는 아카시아 달큰한 속삭임, 복사꽃 향기 빚어가는 부암동 사람들. 마을에 담긴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걸어간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 속에서 배제되지 않아도 되고 초조하지 않아도 된다. 낯선 동네한 바퀴 놀이는 한심할지언정 비참하지 않고 외로울지언정 비굴하지 않다.
부암동엔 참 예쁜 주택이 많다. 그 주택들 사이를 지나면서 10년~20년 뒤에 내가 살고 싶은 집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누구와 함께 살 건지도 꿈꿔보고, 그들과 만들어갈 20년 뒤의 내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즐거운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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