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는 것은 언어학자가 되는 걸 의미합니다. 고전읽기란 말의 참뜻을 가려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공정’이니 ‘정의’니 하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용될 때, 우린 그것의 참 뜻을 고전에 비추어 복원해낼 수 있습니다. 즉, 우린 고전을 읽으면서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는 사람은 모조품을 가려내는 감정사와도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고전을 읽을 때 우린 사라진 고대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은 희미해졌지만 예전에는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를 새롭게 되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전은 ‘오늘’의 공백을 드러내줍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 없는 것, 혹은 있더라도 제대로 있지 않은 것을 찾은 후 그것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 전체를 일컫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리아스>라는 고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오늘의 공백은 무엇일까요? 이 책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명예로운 삶’입니다. 오늘날 ‘명예로운 삶’이 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혹시 오늘 우리에게 명예란 그럴듯한 차를 타고 좋은 아파트에 살며 값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좋은 학벌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업에 종사하는 것일까요? 아니, 진심으로‘ 명예’라는 말에 관심이 있긴 한 걸까요?
하지만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통해 명예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이야기합니다. 명예는 오직 고귀한 행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행위가 고귀한 행위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일리아스>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하지만 그 전쟁 전부를 세세하게 전해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시작한 지 9년째 되던 해의 어느 50일간의 이야기만 다룰 뿐입니다. 10여 년 간 있었던 일을 단 50일 안에 담아서 이야기하다니! 내용 전달이나 제대일까 걱정스럽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호메로스는 50일 안에 트로이 전쟁 전부를 넣어 둘만큼 솜씨가 좋은 장인이었었습니다. <일리아스>의 놀라움은 단 50일 안에 10여 년간의 일을, 아니 우리 인생 전부를 담았다는 데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의 서술 전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호메로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전부 다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했고 그 밖의 많은 사건들은 삽화로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핵심만 말하려다보니 구조가 논리적으로 매우 엄격합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일리아스>는 총 24권으로 되어 있으며, 1권과 24권, 2권과 23권, 3권과 22권이 서로 대응하는 식의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권에는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나옵니다. 24권에선 그의 분노가 해소됩니다. 1권에선 인간이 신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고 24권에선 신이 인간에게 부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2권에선 함선의 목록이 나열되고 23권에선 영웅의 명단이 제시됩니다. 3권에선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파리스 왕자와 메넬라오스의 결투가 나오고 22권에선 전쟁을 마무리할 영웅들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결투 장면이 나옵니다. <일리아스>는 매우 방대한 책입니다. 때문이 이렇게 구조를 알아둬야 길을 잃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대는 자신을 감히 신들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불사신과 대지 위를 걷는 인간들은 결코 같은 종족이 아니니라.”
<일리아스>의 밑바탕에는‘ 인간은 신과 다르다’는 자각이 깔려 있습니다. 인간은 신과 달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렇게 삶을 노래했는지 모릅니다.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그런데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허무하기만 한 걸까요? 아니면 우리의 삶도 고귀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영웅 아킬레우스의 삶을 통해 제시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클리프턴 패디먼은 <일리아스>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이야기의 주된 라인은 그의 분노, 그의 시무룩함, 그의 야만 행위를 추적하다가
마지막에 그의 고상한 성품을 확인한다.”
이야기는 전리품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아킬레우스가 분노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왕에게 전리품을 빼앗긴 나머지 삐친 아킬레우스는 모든 전투에 불참하겠노라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이내 시무룩해집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고향에 돌아갈 것인지 전쟁에 계속 참여할 것인지 고민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예언에 따르면 전쟁에 계속 참여할 경우 그는 죽습니다. 만약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죽음을 다소 늦출 수 있습니다.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아킬레우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머니 은족의 여신 테티스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나를 죽음의 종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소.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을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죽음의 종말이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아킬레우스가 전쟁터에서 죽는다면 그는 불멸의 명예를 얻습니다. 그 죽음은 공동체를 구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죽을 결심을 하고 전투에 참여하려는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그의 어머니가 하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암 그래야지, 내 아들아!
지칠 대로 지친 전우들을 갑작스런 파멸에서 구한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니까.”
즉,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는 이가 영웅이며, 그런 영웅만 필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멸의 이름을 얻는다는 것이 호메로스의 생각입니다. 이처럼 호메로스가 말하는 명예는 세속적인 부나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일리아스>의 명예는 자신을 희생하여 공동체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명예로운 행동만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어 줍니다. 진정한 명예는 많은 돈을 축적하는 것도 수백억짜리 건물을 짓는 것도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가, 그것이 기준입니다. 그러니 만약 사회적인 비판에 직면한 이들이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공동체의 위기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아닐까요?
번역본은 단국대 천병희 교수의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라오콘의 죽음이나 트로이 목마와 같은 잘 알려진 사건은 <일리아스>에 나오지 않습니다. 트로이가 어떻게 함락되었는지 보고 싶은 독자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보십시오.
김영수|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50대에도 고전을 읽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50대와 함께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중이다. ‘학교가 아니라 삶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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